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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내구제 [공감]마음이 기억을 마시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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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민종 작성일25-06-25 11:19 조회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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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내구제 정서적으로 이해하면서도 경험적으로 와닿지 않던 말 중 하나가 ‘집밥이 그립다’였다. 난 어디서 무얼 먹든 집에서 먹어온 것에 비하면 대체로 맛있다며 감탄했으니까.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전에 친구들과 요기하러 갔다 순두부의 보드라운 식감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고소한 가지무침이나 꼬들꼬들한 미역줄기볶음은 대학 후문의 백반집에서 처음 접했다. 나중에 직장을 얻고 부엌과 침실이 분리된 주거공간을 갖게 된 후 이런저런 요리를 시도하며 알았다. 배달음식이든 학식이든 내가 만든 것보다는 맛이 좋다는 사실을. 손맛뿐 아니라 ‘손맛 없음’도 전승되나 싶었다. 집밥과 관련해 이렇다 할 추억이나 기술은 없지만 그렇다고 영혼의 안식을 얻을 음료나 음식마저 갖지 못한 건 아니다.
고풍스럽진 않고 낡고 각지기만 한 건물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파르페와 레모네이드를 파는 고전적 카페와 로즈버드나 던킨도너츠 등 프랜차이즈가 섞여 있었고 일부 대학가엔 스타벅스도 들어왔지만, 일상의 일용할 음료는 그 법학관 2층 복도 끝 자동판매기에서 나왔다. 맹맹하고도 쓴맛 났던 블랙커피나 맛의 차이를 도통 알 수 없던 밀크커피와 크림커피 대신 자판기 우유를 즐겨 마셨다. 탈지분유를 뜨거운 물에 녹이고 프리마와 설탕을 가미했을 음료를 한 모금 삼키면 포근포근해졌다. 아기 입맛이라고 주위에서 놀렸지만 내 미각으로 그건 어른의 우유 맛이었다.
공강 시간이면 자판기 앞에서 친구와 재잘댔고, 세미나 함께하자며 후배를 설득했고, 전날 다퉜던 선배와 화해했다. 3학년 마칠 무렵 신축 건물로 이전했지만, 학부 시절 하면 습기 찬 옛 건물의 복도부터 떠오른다. 이후 <무빙>이란 드라마에서 두 특수요원이 자판기 커피를 뽑다 가까워지는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열아홉과 스물 무렵 내게 수행할 작전 같은 건 없었으나 계단참의 발소리에 귀 쫑긋해진 채 기계에 동전을 최대한 느릿느릿 밀어 넣으면서 어떤 이와 마주칠 계기를 만들고 싶어 했던 순간들은 있었다고 말이다.
생선을 굽거나 조리는 냄새 또한 각별했다. 주택가 아닌 상점 거리에서 풍겨도 가정요리의 느낌을 주며 막연한 향수를 불러왔다. 집에서 자주 해 먹었던 것도 아닌데 어디서 기인한 감정일지. 구시가지에 나갔다가 냄새에 이끌려 식당 문을 밀고 들어서며 궁금했다. 2인석은 다 찬 데다 혼자서 4인용 탁자를 차지하려니 면목 없어 주방 귀퉁이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덕분에 삼치와 고등어, 자리돔 등이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밥공기는 절반도 안 비우고 야옹이처럼 생선만 말끔히 발라 먹자 생선 굽던 아저씨가 다음엔 미리 말하라 하셨다. 밥 적게 먹으니 삼치를 특별히 큰 도막으로 구워주겠다고. 깍쟁이 느낌의 아주머니가 카운터에서 계산하다 말고 아저씨에게 눈을 흘겼다.
몰래 풋 웃다 기억해냈다. 대상 모를 그리움의 근원을. 열세 살 때 성당 서고에서 꺼내 드니 뿔테 안경 쓴 고등학생 오빠가 그건 네 나이대에 읽는 거 아니라며 내려놓게 했던, 그래서 도리어 사춘기적 호기심이 일었던, 현대고전 중 하나일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온 구절이다. “두 내외는 계집아이도 없이 퍽 외롭게 살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다정스럽고 흡족한 부부다. (…) 생선 한 마리라도 맛나게 보글보글 지져서 머리 맞대고 의좋게 먹는다.”
또 더 있다. 어릴 적 독감으로 밤새 펄펄 끓던 열이 내린 아침, 긴 홈웨어를 입은 외할머니가 “우리 강아지 깼나” 하며 주공아파트 부엌에서 내어주던 식혜의 청량함과 마가린 발라 구워 설탕 솔솔 뿌린 식빵의 달콤함. 지구 저편에서 공부할 무렵 선배 언니가 기숙사 공동부엌에서 만들어준 감자수제비와 박사후연구원 시절 수녀님들이 겨울밤에 과일 썰어 넣고 보글보글 끓여준 뱅쇼. 여름철 배앓이로 종일 굶은 오늘, 마음이 기억을 마시고 먹었다.
“우리의 몸은 우주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자율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몸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우주를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과 우주, 두 미지의 영역을 연결하고 탐구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영국 출신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75)는 조각으로 그런 시도를 해 왔다.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에서 지난 20일부터 열린 곰리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 ‘DRAWING ON SPACE’와, 곰리와 일본 출신 건축가 안도 다다오(84)가 협업해 설계하고 개인전과 함께 문을 연 공간 ‘GROUND’에서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안도는 2013년 문을 연 뮤지엄산의 공간을 설계했다.
뮤지엄산 본관 청조갤러리에서 오는 11월30일까지 열리는 개인전에서는 철선으로 된 둥근 고리들이 눈에 띈다. 갤러리 1관에서는 2015~2017년 제작된 ‘Liminal Field’ 연작 7점이 곧게 선 사람의 형태로 보는 이들을 기다린다. 둥근 고리들은 땅에서부터 서로 붙어 다리와 몸통, 머리를 이룬다. 전시장의 흰 벽을 배경으로 두고 서 있는 조각은 가만히 보면 공기 방울의 집합체 같다. 고리의 두께는 얇아 바람이 불면 흔들릴 수도 있을 법한 정도다. 각 조각의 높이는 1m84~2m로, 키가 큰 성인과 비슷하다.
갤러리 3관은 Liminal Field의 크기를 대폭 확장해 놓은 듯한 ‘Orbit Field Ⅱ’(2024)가 가득 메우고 있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용수철 장난감을 한껏 늘려놓은 것 같다. 굵기가 23㎜인 대형 철제 원형구조물은 총 37개는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성인이 들락날락할 수 있을 만큼 커서 전시장 천장에 닿을 정도다. 관객은 전시장 안에서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철제 원을 넘나들어야 한다.
인간은 모두 신체를 갖고 있지만 그 안의 모습을 보지는 못한다. 인간은 우주에 속해있지만 낮과 밤, 계절의 변화 정도를 빼고는 우주의 움직임을 알지 못한다. 관객은 곰리가 철제 고리로 만들어 놓은 조각을 보면서 신체와 우주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된다.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전시장의 흰 벽과 조명은 조각의 존재감을 줄이고, 보는 이가 상상력을 발휘해 남은 공간을 채우게 한다.
상설 전시 공간인 GROUND에서도 화두는 공간과 인체다. 하부 지름이 25m, 높이가 8m인 반구 형태의 공간의 맨 꼭대기에 지름 2.4m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은 시간에 따라 바닥을 비추는데, 로마제국의 신전이자 성당인 판테온과 그 형태가 같다. 돔 형태의 구조 때문에 보는 이들이 내는 말소리와 발소리가 울리며 공간을 채운다.
또 눈에 띄는 것은 외부로 통하는 반원 형태의 구멍이다. 그곳을 통해 앞마당 같은 공간으로 나갈 수 있고, 넓게 펼쳐진 능선과 산을 가득 채운 나무들도 볼 수 있다. 공간 바닥에는 ‘Block Works’ 연작 7점이 전시돼 있다. 육면체 벽돌을 서거나 앉거나 누운 사람 형태로 쌓은 듯한 철제 조각이다. 얼핏 보면 녹이 슬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곰리는 “압축된 흙으로 만들고 싶었다”며 “(흙이) 대기와 반응하며 변하기 때문에 일부러 철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개관을 하루 앞둔 지난 19일 GROUND를 공개하며 기자들과 만난 곰리는 “공간이 완성된 건 어제(18일)였다. 오늘이 공간 탄생의 첫 순간”이라며 “관람자와 관람 대상이 분리되지 않고 한 공간의 부분이 되는 경험을 한 것 같다. 이 작품을 처음으로 완성해주신 분들이 바로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개인전에서 보는 이의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한 곰리는 상설 공간에서도 보는 이의 참여로 작품이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
곰리는 “작품으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선언하거나 우주론을 주창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길 바란다”며 “작품을 경험하는 관람자가 답을 찾을 수 있다. 관람자의 경험이 곧 작품의 주제”라고 말했다. 공간의 천장과 옆부분에 뚫어놓은 구멍은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가 작품에 간섭해 변화하는 모습을 담기 위해서이다. 그는 “벌레들이 작품과 접촉하기도 할테고, 겨울엔 눈도 내릴 것이다. 공간이 변화에 노출될 텐데, 그 변화를 조망하는 것도 기대가 된다”며 “내부와 외부위 경계를 허물고, 밖에서의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게 (공간의)기획 의도”라고 말했다.
곰리는 초기부터 자신의 몸을 석고로 캐스팅했고, 이후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작업을 하는 등 오랜 기간 다양하고 실험적인 조각을 해 왔다. 그는 “조각이란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예술”이라며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기계의 종이 돼 화면에 빠져 살고 있다. 조각은 직접적으로 만질 수 있고, 또 실질적인 경험을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개인전과 GROUND를 모두 관람할 수 있는 안토니 곰리 패키지는 대인 3만9000원이다. 오는 9월까지는 3만5000원으로 할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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